전시장에 들어서면, 추상미술 1세대 여성 화가 이성자 작가님의 작품들을 먼저 볼 수 있습니다.
1월의 도시 작품 1973년 작품이지만, 요즘에 제작한 것이라고 해도 믿을만하죠?
작품명: 숨겨진 나무의 기억들
이 작품은 이성자 작가님의 숨겨진 나무의 기억들이라는 작품입니다.
2003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경매로 구입했다가 18년도경에 위작으로 판명되어 한차례 홍역을 치렀죠
위작은 캔버스 뒷면에 작가님 서명이 없었다고 합니다. .
이 작품은 진작이겠죠?
작품명: 하늘III 29-V-68 #23
이성자 작가님 작품을 보면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김환기 작가님의 뉴욕시기(1960~1970년대)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작품명: 무제 21-II-70 #148
작가님의 말년 화풍을 대표하는 전면점화입니다.
너무 예쁘지 않나요?
작품명: 무제(우측)
안내데스트 옆쪽으로 올라가면, 유영국 작가님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유영국 작가님은 한국 최초 추상주의 화가이죠.
작품명: 무제(좌측), 작품(우측)
강렬한 원색, 절제된 조형 미학의 정수라고 느꼈졌던 작품들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총 26점의 작품이 있는 전시로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들의 내공이 한껏 느껴졌습니다.
추천별점
☆ ☆ ☆ ☆ ☆
<전시정보>
전시명: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김환기,유영국,이성자 작가: 김환기,유영국,이성자 전시기간: 2024.04.23-05.23 관람시간: 화-일 10:00-18:00 관람료: 무료 문의: 02-2287-3591
❖ 전시설명❖
2024년 4월 23일부터 5월 23일까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유영국,이성자 작가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김환기,유영국,이성자>가 현대화랑에서 전시합니다.
이번 전시는 김환기의 뉴욕 시대에 제작된1960~70년대 작품과 유영국의1970~1990년대 강렬한 색채로 조형 실험이 완성된 작품 그리고 이성자의1960~1970년 대에 제작된'대지 시리즈'와'도시 시리즈'등 세 작가의 예술적 기량이 집대성된 주요 작품을 선보입니다.
현대화랑은 1970년 개관한 이후, 한국 근현대미술의 전시를 적극적으로 개최해 왔고, 특히 추상미술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1974년 프랑스에서 활동 중이었던 이성자 화백을 초대하여 개인전을 열었고, 연이어서 1975년에는 유영국 화백의 첫 개인전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1977년에는 1974년에 작고한 김환기 화백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회고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한국 현대미술의 선두에 서있는 김환기,유영국,이성자는 현대화랑과50여 년을 함께했으며. 이번에 전시하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김환기,유영국,이성자전은 한국 추상회화의 출발점에 서 있는 세 작가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회고할 수 있는 뜻 깊은 전시입니다.
From April 23 to May 23, 2024, Pioneers of Korean Abstract Art by Kim Hwan-ki, Yoo Young-kuk, and Rhee Seund-ja: Kim whan-ki, Yoo Young-kuk, Rhee Seund-ja” will be on view at the Museum of Modern Art. The exhibition showcases key works from the three artists' artistic careers, including Kim whan-ki's New York-era works from the 1960s and 1970s, Yoo Young-kuk's intensely colored and sculptural experiments from the 1970s and 1990s, and Rhee Seund-ja's “Earth Series” and “City Series” from the 1960s and 1970s. Since its opening in 1970, the museum has been actively organizing exhibitions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art, especially abstract art, and in 1974, the museum invited the French artist Rhee Seund-ja to hold a solo exhibition, followed by the first solo exhibition of Yoo Young-kuk in 1975. In 1977, the museum organized a retrospective exhibition of Kim whan-ki, who passed away in 1974. Kim Hwan-ki, Yoo Young-kuk, and Rhee Seund-ja have been at the forefront of Korean contemporary art for more than 50 years, and this exhibition, Pioneers of Korean Abstract Art: Kim whan-ki, Yoo Young-kuk, and Rhee Seund-ja, is a meaningful retrospective of the works of three artists who stood at the beginning of Korean abstract painting.
"나에게 그림이란, 무엇가 다른 것 손으로 만든 타인을 감동시키는 어떤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하지만 그 역시 하나의 정신적 놀이이며 명상 혹은 기도와 같은 행위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화가, 김창열 화백 이야기
캔버스 위에 영롱한 물방울을 그리는 화가로 잘 알려진 김창열 화백(1929~2021)은 1929년 12월 24일 평양에서 북쪽으로 300리 떨어진 대동강 상류의 물이 깊고 맑은 평안남도 맹산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에게 천자문과 서예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붓글씨와 회화를 가까이하며 성장하게 된다. 이는 훗날 물방울과 천자문에 대한 원초적 심상을 철학적으로 명상적인 '회귀' 연작에 녹여낸다.
4-5세경 가족과 함께 (어린시절) / 출처: 김창열 미술관
"할아버지와 정이 깊었지. 천자문을 배우면서 붓글씨를 쓰게 되었어. 글씨를 배우는데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동그라미를 왜 그렇게 잘 그리느냐고 칭찬해 주니까 나는 신이 나서 신문지가 새까맣게 될 때까지
글씨를 써 나갔어."
이후 김창열 화백은 평양의 광성고보를 다니면서 외삼촌으로부터 데생을 배웠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광성고보 3학년때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새 시대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반공주의자로 수배를 받고, 유치장 신세를 지는 등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억압을 받다가 결국 1946년 서울로 내려오게 된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형편이 좋지만은 않았다. 근 1년간 피란민 수용소에서 지내며 지독한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굶주림 속에서도 서울의 다양한 회화연구소를 다니며 미술공부에 정진하였다. 특히 16세 때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 연구소에 들어가 그림을 배운 경험은 훗날 화백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성북회화연구소(1947) 뒷줄 왼쪽 네번째 / 출처: 김창열 미술관
“성실과 끈기를 배웠지. 정말 존경했거든. 물방울 그리면서 선생님 영향을 내가 많이 받았구나 생각해.
우리 누가 움직이지 않고 하루종일 그림 그리나 내기하자 그러셨다고. 선생님이...
나는 그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 이쾌대 선생은 나의 유일한 스승이야."
이후 제1회 검정고시에 응시해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게 되지만,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전쟁 속에서 인민의용군에 강제 입대한 김창열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 경찰 학교를 지원하였다. 휴전이 되자 김창열 화백은 서울대학교에 다시 등록하려고 했으나, 월북한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녔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등록이 거부되고, 결국 1955년까지 경찰직을 지속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끊임없이 습작하며 붓을 놓지 않았다.
“나는 성분이 나쁘다고 낙인이 찍혔어.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던 이쾌대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이었어.”
1955년에는 고등학교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서울과 수도권의 고등학교에서 짧은 기간 미술교사로 일하게 되고, 학교교실에 아틀리에를 마련해 작품 제작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1957년 5월 평소 친분이 있던 장성순, 하인두, 김서봉, 김청관, 라병재, 조동훈, 이철, 김종휘, 김충선, 김영환, 문우식과 함께 뒤에 <한국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이라는 동인회를 결성하고, 5월 1일부터 9일까지 미국 공보원에서 첫 동인전을 개최하며, 새로운 미술 운동을 시작했다. 후에 박서보를 찾아가 협회에 가입시켰고, 그의 제안을 받아 동인전의 이름을 <현대전>이라고 약칭하고 제 2회부터 함께 해나간다. 김창열 화백은 이 현대전을 통해 당대 전위 미술의 주요 경향인 앵포르멜의 흐름을 이끌었다.
1961년에는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 미술가협회가 경복궁미술관에서 연합전을 열고, 통합 결성한 <악뛰엘>에서도 창립 멤버이자 그룹의 주축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변화를 상징하는 텍스트인 악뛰엘의 선언문도 직접 작성한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새로운 미술을 향한 열정과 그 도래를 천명했다.
화신백화점 한국현대미술가협회 전시장(1958) 왼쪽에서 세번째 / 출처: 김창열 미술관
“해진 존엄들 여기 도열한다. 그리하여 이 검은 공간 속에 서로 부둥켜안고 홍조한다”
1950년부터 1960년대의 김창열 화백의 그림은 캔버스에 두껍게 바른 물감의 거친 질감, 붓을 휘두른 작가의 몸짓과 그 흔적을 강조했다. 전쟁이 남김 트라우마를 담은 앵포르멜 계열의 추상 연작 <상흔>과 <제사>가 그것이다.
제사(1964) 캔버스에 유채 91 x 117cm / 출처: 김창열 미술관
이후 김창열 화백은 해외로 눈길을 돌린다.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하며 국제무대에 처음 작품을 소개하고, 1963년 서울의 프레스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다. 1965년에는 대학 은사였던 김환기의 주선으로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화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이후 훌브라이트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으로 떠난 뒤 196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가하고, 4년간 뉴욕에 머물며 록펠러 재단 장학금으로 아트스튜던트리그(Art Student League)에서 판화를 전공한다. 그는 미국의 미술 환경에 적응하며 작품 제작을 이어갔다.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 당대 미국 주류 화단 흐름에 영감을 받은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반복되며 리드미컬하게 배열된 <구성> 연작을 그리며 변화를 모색했다.
구성(1969) 캔버스에 아크릴릭 161 x 86cm / 출처: 김창열 미술관
이후 그는 백남준의 도움으로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하였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좀 더 다양한 미술 경향이 공존하는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며 작업을 이어간다.
잡지 <공간> 인터뷰(1984) 왼쪽 백남준, 오른쪽 김창열 / 출처: 김창열 미술관
“한국을 떠나야 한다. 이제 내 작품은 국제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물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런 절박한 생각을 가졌어. 나는 프랑스 유학을 꿈꿨어. 파리 땅만이라도 밟아 봤으면 좋겠다고 꿈을 꿨는데
록펠러재단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던 거였어. 한달 동안 30개의 미술관, 학교를 견학했지. 이 여행이 세계 미술계의 도전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 같아. 그 뒤 미국에 계속 체류하면서 넥타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운 좋게 일년간 다시 록펠러재단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어. 장학금을 아끼고,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럽·이집트·그리스·인도 여행을 계획했지. 그런데 결국 유럽에 머물렀어."
아틀리에가 필요했던 김창열 화백은 파리에서 약 15km 떨어진 팔레조(Palaiseau)의 마굿간을 공방으로 쓰던 독일의 한 젊은 조각가에게 작업실을 이어 받아, 아틀리에와 숙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평생의 반려자인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 여사를 만나게 된다.
잡지 <주간여성> 인터뷰(1979) 왼쪽 마르틴 질롱, 오른쪽 김창열 / 출처: 김창열 미술관
1969년에 파리로 거처를 옮긴 후 김창열 화백의 작품은 단단하고 굳은 형태의 구(球)가 점차 점액질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현상’ 시리즈에서는 구상과 추상이 교묘히 교차하는 가운데 액체인지 고체인지 모호한 점액질의 물질이 속에서부터 밀고 나와 흘러내리는 듯한 형상을 보여 주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은 물방울 시리즈와 이전 기하학적 시리즈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현상(1971) 캔버스에 아크릴릭 150 x 150cm / 출처: 김창열 미술관
“밤새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유화 색채를 떼어 내고 캔버스를 재활용하려고 물을 뿌려놨는데 물이 방울져 아침 햇살에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몸을 떨며 물방울을 만났다.”
맑고 투명한 물방울은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대표이미지다. 물방울의 시작은 1972년 파리에서 작업하던 중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재료 살 돈을 아끼려 캔버스 뒷면을 물에 적셔 묵힌 후 물감을 떼어 또 그리는 식으로 재활용하던 어느 날,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는 생명의 근원인 물과 영롱한 물질성에 영감을 얻어 마침내 1972년 물방울 그림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 연 첫 개인전이 우연히 길을 지나던 파리의 일간지 <콩바(Combat)>의 선임기자 알랭 보스케의 눈에 들어 기사화되고, 이후 다른 신문사에서도 앞다투어 취재를 해가면서 순식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2년 파리의 권위있는 전위미술 전시회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 초대받아, 깜깜한 밤을 연상시키는 검은 바탕에 오롯한 물방울 하나와 은은한 그림자를 그린 <밤에 일어난 일(Event of Night, 1972)>을 출품하며 유럽에서 정식 데뷔한다. 1973년에는 놀 인터내셔널 프랑스에서 물방울 회화만을 모은 첫 프랑스 개인전을 개최하여 물방울 화가로서의 명성을 확실히 얻게 된다.
"물방울들은 우리를 일종의 자기 변형으로 끌고 간다. 그 물방울들은 보기 드문 최면의 힘을 갖고 있다."
< 프랑스 일간지 콩바(Combat)에 실린 알랭 보스케의 평문 중 >
밤에 일어난 일(Event of Night, 1972)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x162cm 출처: 김창열 미술관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재료 연구를 하던 중 우연히 다락방에서 발견한 프랑스 일간지 <피가로(Le Figaro)> 1면에 수채 물감으로 물방울을 그려넣으면서 비로소 문자와 물방울의 조합이 시작된다. 이 것이 바로 1975년작 <피가로지(Le Figaro, 1975)>이다. 작품을 통해 캔버스에 환영으로만 존재하던 물방울을 현실 세계로 옮겨왔다는 찬사를 받았으며, 이 조합은 나중에 천자문을 배경으로 한 <회귀>시리즈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피가로지(Le Figaro, 1975) 신문위에 수채 53.5 x 42cm / 출처: 갤러리 현대
그리고 1976년에는 물방울 그림을 처음으로 한국에 선보인다. 그 해 도쿄화랑에 이어 서울의 갤러리현대(당시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은 개막 전에 출품작품이 모두 팔리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국 미술시장에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다. 물방울 그림의 인기몰이는 이미 이때부터 불이 붙었다.
김창열 화백은 1980년대에 접어들며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친 마대의 날것의 특징을 잘 살리는 한편, 이러한 표면에 구성과 배치가 자유로운 영롱한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내면의 추상성도 동시에 표현했다. 특히 1986년 작 300호 크기의 물방울<Water droplets(1986)>은 마대에 색을 넣어 표면의 질감과 물방울의 반짝임을 대비시킨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날 것의 바탕과 그려진 물방울의 이질감을 강조하며 실제 물방울의 물질성은 사라지는 효과를 얻는다.
Water droplets(1986) 마대위에 유채, 아크릴릭 190 x 280cm / 출처: 갤러리 쇼움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마대 자체를 여백으로 남긴 이전 작품과는 달리 한자의 획이나 색점, 색면 등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동양의 정서를 끌어들였다. 물방울 역시 70년대의 투명한 물방울과 달리 색채가 들어가 입체감이 도드라진다. 이는 <해체> 연작을 통해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동양의 정서를 끌어들였다.
해체(1983) 마포에 염료, 유채 250 x 330cm / 출처: 김창열 미술관
“붓글씨라는 게 사실은 그림이야.”
1980년대 후반부터 김창열 화백의 작품에는 한자 또는 천자문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한자를 물방울 회화에 도입한 <회귀> 연작을 본격적으로 그리면서, 물방울과 문자의 조화를 한껏 끌어올린다.
<회귀> 연작에서 그는 먹으로 한지에 문자를 겹쳐 빼곡하게 쓰거나 캔버스에 인쇄체로 또박또박 천자문을 쓰고, 그것을 배경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무리지어 있도록 화면에 그린다. 물방울과 문자는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며 어우러지고, 물방울은 문자를 통해 그 영롱함을 극대화한다. 천자문과 도덕경 등의 글자들은 화면에 구성적인 요체로 자리 잡아 역사적 흔적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는 현실의 물방울과 어우러져 시공을 초월한 조화로움을 드러낸다.이를 통해 동양 철학의 핵심적 사상을 담아내려는 작가의 의지를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 김창열 화백에게 천자문이란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우며 회화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추억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특별한 매개체이기도 합니다.작가 자신은 물론 평론가들도 천자문 시리즈인 <회귀>에서 물방울과 한자의 조화는 이미지와 문자의 대비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평가한다. 동양의 철학과 정신성을 드러내며 새로운 사유의 경지를 열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회귀 PK91020' (1991)>는 <회귀> 연작 가운데서도 김창열 물방울 작품의 결정체로 꼽힌다. 유년 시절과 자연 속으로의 본원적 회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어 1990년대부터는 <회귀>를 주제로 문자와 물방울을 접목한 작업을 주로 했으며, 돌과 유리, 모래, 무쇠, 나무, 물 등을 재료로 물방울 회화를 설치미술로 확장한다. 그리고,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 그는 양국의 문화교류 저변 확대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1996년에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는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노랑, 파랑, 빨강 등 캔버스에 다양한 색상을 도입하며 더욱 다채로운 작품을 대중들에게 선보이기 시작한다. 작품의 전체 화면은 훨씬 밝아졌고 형태와 배경의 변화를 통해 더욱 화사해진다.
2004년에는 프랑스 국립주드폼미술관에서 물방울 예술 30년을 결산하는 초대전을 개최하였고, 한국에서는 2009년 부산시립미술관, 2014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회고하는 전시를 개최하였다. 그는 물방울을 그리는 데 대해 1988년 일본 도쿄 전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사물을 투명하고 텅 빈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용해하는 행동이다. 나는 나의 자아를 무화시키기 위해 이런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
출처: 제주환경일보
김창열 화백은 1969년부터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양국 간 문화교류에 이바지하면서 한국미술을 유럽에 소개하는 기회를 만드는데 앞장서 온 공로로 201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2017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한다. 그리고 2013년에는 6·25전쟁 당시 1년 6개월 정도 머무른 인연으로 대표작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2016년 제주도에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이 개관한다. 서울 평창동의 작업실에서 2019년까지 신작을 발표하고, 2020년 갤러리현대에서 물방울과 함께 문자의 도입과 전개 양상에 초점을 맞춰 기획한 <더 패스> 전을 끝으로 2021년 1월 5일,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